
읽기 전 두 가지 착각이 있었다. 무겁고 심오하고 치밀한 SF 소설일 줄 알았으나, 영 어덜트 소설(청소년 소설)이었다. 단권으로 완결되는 소설인 줄 알았는데, 시리즈물의 첫 권이었다. 주인공들에게 주어지는 빡센 딜레마, 가볍고 발랄한 해법. 그리고 '2권 선더헤드에서 계속'. 전개가 다소 심심했고, 납득 가지 않는 설정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상상과 생각을 자극하는 책이었다.
불멸을 꿈꿀 수 있는 세계
수확자 세계관에서 인류는 더 이상 질병이나 노화로 죽지 않는다. 문명과 기술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묘사된다. 이런 세상을 이룩한 건 인공지능 '선더헤드'다. 선더헤드는 세계의 거의 모든 부분을 관할하고, 인류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갖지만, 어떤 작업이나 연구도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 되지는 못한다. 모든 지식은 선더헤드에 보관되어 있어 언제나 열람할 수 있고, 필수적인 업무들도 선더헤드가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더헤드는 기후 문제도 해결했고,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세상에는 빈곤도 없고 차별도 없다. 정치인도 없다. 선더헤드가 지상 모든 곳을 감시하고, 인간을 보호한다. 불에 타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 죽어도 살려낸다. 불이 나기도 전에 불씨를 제압한다. 하지만 한 가지 개입하지 않는 문제가 있는데, 자연적인 죽음이 사라짐에 따른 인구 과잉 문제다.
걸어다니는 죽음: 수확자
대신 인간들이 독립적인 자치 기관을 만들어 냈다. 수확을 통해 인구를 조절하는 기관, 수확령이다. 수확이란 살인을 뜻한다. 수확자들은 각각 연간 몇백 명을 수확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때 수확 대상은 수확자가 임의로 선별한다. 물론, (특정 계층이나 인종만 죽인다든지 하는) 편견이 작용해선 안 된다는 최소한의 규율은 있다. 그외엔 자유롭다. 사망 시대(인간이 노화, 질병, 외상으로 죽는 시대)의 죽음을 재현하고자 최근에 차를 산 청소년을 찾아가서 죽인다든지, (사고가 종종 일어났던 장소인) 주차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죽이기도 한다. 비행기 탑승자 전원을 죽이거나, 건물 하나를 통째로 수확하면서 카니발을 벌이기도 한다.
소설의 도입에선 불멸이 권태로워 옥상에서 뛰어내리는(재생된다) 행위가 소개되고, 전반에 걸쳐서는 죽음이 두려워 수확자의 발밑을 기는 민간인들이 배경처럼 등장한다. 책에서 생후 5천 년간 수확 대상이 될 확률이 50%라는 서술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5천 살 먹을 동안 수확자를 목격하고도 수확당하지 않은 경험을 누적해 온 사람들이 50%라는 의미겠다. 그럼에도 수확자가 있는 공간은 공포에 휩싸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달아나거나, 1년이라는 면제권을 얻기 위해 아첨을 떤다.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수십 년 동안 확립한 자아보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쌓아 온 자아가 죽음에 더 큰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쯤 되면 생존이란 얼마나 거대한 관성이 되어 있을까? 하여간 사람들에게 수확자란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고, 미지의 영역이다. 수확 대상으로 선택되는 기준을 가늠하지 못하기에, 학생은 수확을 피하기 위해 똑똑해 보이는 걸 경계하기도 한다.
수확 제도에 대한 의문
현대의 죽음은 대체로 점진적인 죽음이고(노화, 암 등), 이 경우 예비하는 기간이 주어진다. 돌발적 사고로 인한 죽음은 흔치 않다. 그중에서도 살해당하는 것은 아주 끔찍한 형태의 죽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수확자 세계에서 죽음을 집행하는 방식은 모두 묻지마 살인이다. 도인이나 공무원 같은 수확자한테 당하느냐, 범죄자 같은 수확자한테 당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고사를 모방하고자 죽기 전 가족과의 전화 통화도 허락하지 않는다. 사망 시대에는 청소년들도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참고해 그때와 같은 비율로 청소년도 죽인다. 어린이든 노인이든 생명의 가치는 같다고 생각하지만, 몇천 년도 살 수 있는 시대에 스무살이란 영유아만큼 산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 모방을 통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그런 체계에 보이는 반응은 공포, 그리고 순응이다. 비인도적인 집행 방식이나 권력 구조를 지적하거나 애초에 인구 조절에 접근하는 방식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없다. AI에게 세뇌된 상태도 아닌데 말이다.(AI 선더헤드는 수확령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수확을 거부하고 도주하는 일도 묘사되지 않는다. 수확자들이 탈인간적인 물리적 능력을 가진 건 아니라는 점과(민간인이 기습으로 손을 끌어당겨 면제권을 갈취하는 데 성공함), 주인공이 수확자들을 따돌리는(바람이 부는 방향을 이용해서 DNA 탐지기를 피하는 등) 장면 등을 보면, 코너에 몰린 사람이 수확자를 공격하거나 달아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그러다 수확자에 반대하는 집단이 조직될 법도 한데 말이다.
수확자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삶의 질 문제도 심각할 것이다. 수확자들은 결국 삶에 짓눌려 스스로를 수확하게 된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꿈이 불사신인 나로서도 수확자가 된다면 오래 살 자신이 없다. 수확자라고 해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견습생으로 발탁되어 1년간 도제식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 고더드는 비록 대량 수확의 즐거움을 위해 364일을 쉬다가 하루에 300명을 학살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지만, 수확자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짧은 기간에 몰아서 해치우는 방식이 나을 듯하다. 매일같이 누군가를 한 명씩 찾아가 죽여야 하는 삶에 애착을 갖는 게 가능할까.
마음껏 낳고, 마음껏 죽이고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스스로 죽고 싶어 한다는 개념이란 낯설다. (감정 나노기를 끌 수 있는 수확자들을 제외하고) 감정 나노기에 의해서 병적인 정신 상태는 치료된다. 따라서 일시적인 감정 상태에 휩싸일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죽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없다. 수확자들은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을 매해 5백만 명씩 살해한다. 그 정도로 인구 조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출산을 자제하는 방식으로는 노력하지 않았을까? 책에서는 자식이 스무 명이 넘는다는 묘사도 나온다. 살해당하지 않을 자유보다 출산의 자유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었나? 알 수가 없다.
현실, 사망 시대에서 자식을 낳는 것은 죽음이나 노쇠에 대한 두려움을 더는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죽어도 나의 유전자와 유산이 남는다는 사실에서 영속성을 느끼려 하는 것이다. 노후 대책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영원히 젊고 풍족한 시대에, 수확될 사람 한 명의 목숨과 교환해 가면서까지 애를 낳고 싶어 할 건 뭐란 말인가? 이미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끝났고 더 이상 개선이 불필요한 시대라면, 후속 세대가 구세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보한 미래를 일굴 거라는 식의 의미 부여도 없을 테고 말이다. 본인의 유전자에 대한 몰두였을까? 대신 자식 같은 AI나 가상현실로 대신할 수는 없었을까? 책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인구 조절을 위해 수확자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식을 여럿 낳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사회적인 인식이 형성되지 않은 건지 궁금하다. 어떻게 너도 나도 거리낌없이 대가족을 이루고 있는 걸까?
현실적으로 모든 죽음의 할당량이 이런 방식(인간이 인간을 죽이는)으로 채워진다면 혼란과 불안은 얼마나 심해질까? 수확자라는 개인의 기호, 신념대로 죽어야 하고, 칼에 찔릴지 알약을 씹게 될지 알 수 없다. 현실에선 살인 사건은 전체 사망 건수에 비하면 극소수인데도 현대인들은 종종 해코지를 당할 것 같은 불안에 노출되곤 하는데 말이다.(특히나 총기 사건이 일어나는 미국이라면 더 심할 것이다) 어쩌면 수확자 세계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적이고 만성적인 불안을 느낄 뻔했을 수도 있겠다. 수확공포증, 수확자포비아 같은 병명이 생길 뻔도 했지만, 병적인 상태를 치료해 버리는 감정 나노기가 먼저 발명됐기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무수한 물음표를 유발하는 책
〈원래 죽음을 예상하고 태어난 사람들이야말로 수확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나?〉라는 말은 인기 있는 금언으로 통했다. ... 사망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살아가는 방식이 불편할 정도로 다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태어난 시대와 함께 죽도록 하자.〉 그것이 수확령 내 사망 후 시대 순수주의자들의 외침이었다.
사망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 즉 선더헤드가 탄생하고 불멸이 발명된 2042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을 집중 수확하기로 했던 사건에 대한 서술이다. 흥미로운 사건이지만, 어떻게 달랐는지 어떻게 불편해했는지 인류가 그 숙청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패러데이는 금욕적이고 죽음의 무게를 아는 인물로 묘사된다. 고더드 등에 비해 호감형 인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의 수확이 거룩한 듯이 묘사되는 건 오히려 몰입을 가장 방해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패러데이가 수확자가 된 동기는 무엇일까? 왜 그렇게 성실하게 수확하는 것일까?
진짜 의문스러운 캐릭터는 로언이다. 별다른 사건도 없이 로맨스 남자 주인공이 되어 시트라에게 목숨을 양보하려 든다. 로언 시점으로 서술되기도 하는데도 그 결심에 대한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게다가 단지 고더드에게 훈련받은 것만으로, 어떻게 고더드 일당을 전투력으로 압도할 수 있게 된 걸까? 고더드는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지를 매번 고민하는, 즐기는 자이기까지 한데 말이다.
퀴리는 침체된, 저승으로 갈 준비가 돼 있는 듯한 인간들을 수확해 주는 수확자다. 과거 인간의 행정부가 존재했던 시절, 독단적으로 대통령과 내각을 수확했고 그 이후로 정부라는 체계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점에서는 인간 중에 사회에 기여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일을 하는 존재가 수확자밖에 없기에, 누구를 죽이든 반향이 없다. 하지만 체제가 바뀌기 전, 정부가 존재하던 시기에 수확자 개인이 임의로 정부를 강제 해체시켰다는 건 놀랍다. 대체 수확령은 어떤 절차로 설립된 걸까? 그런 권위는 어떻게 확보된 걸까? 수확령은 어디 외계인 집단이나 초능력자 집단이 아니라, 인구 조절의 필요성을 느낀 인류가 사회적 합의 하에 설립한 기관이고 구성원들도 평범한 인간들인데 말이다. 궁금해하다 보면 끝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런 점이 재미있기도 하다. 정교한 정합성을 갖춘 세계관이었다면 독자들은 다만 감탄할 뿐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는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웬만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랬나 보다'하고 수용하는 편이라 수확자의 극단적인 설정이 오히려 신선한 질문거리로 다가왔다. 흥미로운 키워드와 함께 비판적 사고를 유도해 준 것이다. '인구 과잉을 막기 위한 랜덤 살해가 말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하는 책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 모든 의문은 청소년 소설이라는 대답으로 뭉뚱그리기가 가능하기도 하다. 물론 청소년 소설임을 미리 알았다면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읽어서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