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단순한 가구가 아닌 인류사의 무대
침대 위의 세계사는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과 나디아 두라니가 펴낸 책이다. 이들은 침대라는 평범한 물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번역된 제목만 보면 역사 뒷편의 야사나 베갯머리 송사, 혹은 치정 같은 미시사들을 속삭여 주는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침대에 초점을 맞춰 인류 문명의 거시적 흐름을 조망하는 책이다.
근현대 이전까지 침대는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고 한다.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침대는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는 거다. 원시 시대의 인류는 나뭇가지와 풀을 엮어 최초의 침대를 만들었다. 불을 다루게 되면서 땅에서 떨어진 공간에서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됐고, 이는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침대는 출생과 사교, 성생활은 물론 권력 행사와 정치적 의사결정, 그리고 죽음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침대를 이용하는 인간의 모습에서는 단순한 잠자리 이상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위생 관념,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인간이 본인을 보호하고 관계를 형성했던 방식, 사회적 위계와 문화적 가치가 표현되는 양상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는 게 책의 메시지다. 이런 시각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형태가 실은 얼마나 깊은 역사를 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 장의 이불 아래에서도 인류의 희로애락과 권력의 역학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침대의 사회적 의미 변화
현대인들은 침대를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산업화 이전까지 침대가 오히려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공간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한 침대에서 가족이나 친구는 물론 낯선 여행자와도 함께 잠을 자는 게 자연스러웠다. 예컨대 귀족 여성이라 해도 면식이 없는 다른 귀족 여성과 침대를 공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19세기까지도 서구의 여관에서는 모르는 사람과 침대를 같이 쓰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다만 한국의 경우 해당사항이 없다. 요를 깔고 자던 시절, 낯선 사람과 잠자리를 공유하는 문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소개되는 사례들은 사실 세계사라기보다 유럽사에 가깝다.)
공동 수면 문화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공간이 부족했던 물리적 제약도 있을 거고, 추운 밤을 나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생존 전략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사회적 의미가 컸다고 한다.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친밀감을 쌓았다. 심지어 정치 논의도 침대에서 이뤄졌다. 산업화 이후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부터 침대도 점차 지금과 같은 사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침대로 보는 부와 계급의 역사
침대는 언제나 권력과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황금으로 만든 침대와 함께 묻혔다. 침대는 내세로 가는 통로이자 절대적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것. 투탕카멘의 황금 침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금박을 입힌 목재에 하토르 여신 같은 신성한 상징을 새겨넣어, 아닌 파라오의 신성함과 권위를 보여 준다. 중세 시대 귀족들의 침대는 네 기둥에 캐노피와 커튼을 두른 화려한 침대였다. 실크나 벨벳으로 만든 커튼에는 가문의 문장을 수놓았고, 깃털 매트리스와 고급 린넨 시트를 썼다. 심지어 침대는 너무 값비싼 물건이라 유산으로 물려줄 정도였다. 이런 침대는 추위를 막고 사생활을 지키는 실용적 기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도구였다. 그들은 침대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반면 서민들의 침대는 초라했다. 대부분은 짚이나 건초를 채운 매트리스를 깔거나 그냥 바닥에서 잤다. 짚 매트리스는 자주 갈아줘야 했고 이와 벼룩이 들끓었다. 물론 벼룩에게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이런 계급적 차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침대가 단순한 과시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수면의 질과 건강을 고려한 실용적인 선택이 되었다는 점이겠다. 다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능성보다는 사치품으로서의 의미가 큰 것도 사실이다. 스웨덴의 해스텐스 같은 명품 침대는 자연 소재로 수작업으로 제작되며,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치품이 되었다. 이처럼 최고급 명품 침대부터 저렴한 매트리스까지, 침대는 여전히 경제적 지위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정치의 무대가 된 침대
현대의 침대는 생활감, 인간적임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과거 군주들은 침대를 정치적 무대로 활용했다고 한다. 프랑스 카페 왕조의 루이 9세는 "왕이 국정을 수행하는 곳에 언제나 군주의 침대를 두어야 한다"는 법까지 만들었다. 튜더 왕조에서는 왕실의 결혼이나 출산 같은 중요한 사건이 침실에서 이뤄졌고, 이는 국가적 차원의 공적 행사로 기록됐다. 헨리 8세의 결혼과 자녀 출산도 정치적 정당성 확보의 수단이었다. 이처럼 침대는 단순한 가구가 아닌, 권력과 통치의 상징적 무대였다.
특히 이 분야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일 것이다. 그는 침대를 권력의 상징이자 통치 도구로 삼았다. 베르사유 궁전의 침실을 통치의 중심지였고, 침대 주변에는 마법이나 주술로부터 침대를 보호하기 위해 하인들이 늘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날로 보면 웃길 수 있지만, 당시엔 왕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귀족들은 왕의 기상과 취침을 돕는 의식을 치뤘다. 횃불을 들고 왕의 침대까지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큰 영광이었다는 거다. 이런 의식들로 귀족의 충성을 확보하고 왕권을 강화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윈스턴 처칠도 침대를 독특하게 활용한 지도자다. 그는 침대에서 신문을 읽고 서신을 쓰며 영국을 통치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처칠의 침실을 "중국 고관처럼 보이는 빨간색과 황금빛 드레싱 가운과 서류 더미로 가득 찬 장소"라고 다소 뜨악한 심정을 기록하기도 했다고 한다. 독일의 공습 중에도 침대에서 낮잠을 자며 자신감과 안정감을 보여준 처칠의 모습은 인상적인 상징이 됐고 말이다.
인간 본연의 수면 패턴
분할 수면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자연스러운 수면 리듬일지도 모른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밤에 두 번 나누어 잠을 자는 게 일반적이었다. 첫 수면을 취한 뒤 한밤중에 깨어나 기도를 하거나 이웃과 대화를 나누고, 집안일을 하다가 다시 잠드는 식이었다. 이런 수면 패턴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체 리듬에 가까웠을까. 하지만 산업화와 전기의 발명으로 이런 식의 수면 리듬은 사라졌다. 현대인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연속 수면이라는 인위적 패턴을 훈련받는다. 직장을 나가게 되면 연속 수면 패턴은 강하게 고정된다. 저자는 이것이 오늘날 만연한 불면증과 수면 장애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통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스러운 수면 리듬에 대한 몸의 항변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자며 체온을 나누었다. 단순히 추위를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친밀감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혼자만의 침실에서 외롭게 잠든다. 스마트폰의 차가운 불빛이 어쩌면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버렸다. 이런 변화는 수면의 질 저하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외로움과 불안, 우울은 현대인의 대표적인 정신 건강 문제다. 과거의 수면 습관이 주는 교훈은 단순히 잠자는 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침대 위의 인류학
이 책은 침대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침대라는 평범한 물건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평가다. 권력자는 침대를 과시의 도구로 삼았고, 서민들은 그곳에서 온기를 나누었다. 출생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처음과 끝도 침대 위에서 맞이했다. 결국 침대는 인간 삶의 희로애락이 켜켜이 쌓인 무대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서구 중심의 서술이 두드러져 다른 문화권의 침대 문화나 관습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침대와 관련된 현대적 맥락도 얕게 다뤄진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통찰은 흥미롭다.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1인 1침대라는 관념이 사실은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 과거 사람들은 낯선 이와도 침대를 함께 써가며 체온을 나누고 이야기를 건넸다는 사실은 현대인의 고립된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옛사람들은 스마트폰 대신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잠들었을까. 좀 더 낭만과 온기가 있지 않았을까? 역사책이 주는 통찰력과 문화인류학적 관점이 잘 어우러진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