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몸을 흐르는 붉은 강물, 피
5리터의 피. 원제목은 9파인트. (9파인트가 약 5리터)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피가 약 3.5리터~6리터라고 한다. 그중 60~70kg의 성인 남성 기준으로 5L라는 제목이 나온 듯하다. 피는 생명 유지의 핵심이자 가장 취약한 요소이기도 하다. 5리터 중 1리터, 즉 전체 혈액량의 1/5만 잃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을 잃게 되며, 1.5리터 이상을 잃으면 생명이 위독해진다. 이국종 교수는 1.5리터 페트병에 물을 담아 거꾸로 쏟으며 "중증 외상환자 발생 시 지금 이 물이 다 쏟아지는 시간 내에 조치하지 못하면 사망하게 된다"고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이 책은 영국의 저널리스트 로즈 조지가 쓴 책이다.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돼 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저자는 피가 가진 과학적, 문화적, 경제적 의미를 풀어내기 위해 영국, 네팔, 아프리카 등 피와 관련된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취재했다고 한다. 빌 게이츠가 본인의 블로그에다 피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라며 추천하기도 했었던 책이다.
인류의 혈액 수급 불균형
이 순간에도 3초마다 한 명이 피를 수혈받는다. 하지만 이런 생명의 순환은 세계적으로 매우 불균형한 상태라고 한다. 전체 헌혈량의 40%는 세계 인구의 16%에 불과한 고소득 국가들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홍콩, 북미, 유럽 국가들의 경우 헌혈 참여율이 높은 반면 전 세계 국가 중 73개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헌혈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당 국가들의 최소 필요 혈액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 역시 낙관적이지 않다. 2050년에는 혈액 공급량이 140만 단위로 감소하고 수요는 510만 단위까지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가파른 인구 고령화로 인한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여성의 경우 철분 부족과 체중 미달로 인한 헌혈 부적격 비율이 높은 탓도 있다. 현재 정기적으로 헌혈하는 인구가 혈액 공급의 중추 역할을 하는데, 이 인구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신규 헌혈자는 줄어감에 따라 공급되는 피의 평균 연령도 오르고 있다고 한다.
피로 쓰여진 무지함의 역사
피에 대한 인류의 무지는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 무지함에서 비롯한 대표적인 의료 행위가 사혈이다.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효용이 없다는 게 증명됐다. 과거 의사들은 인체가 4가지 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균형으로 건강을 유지한다고 믿었고, 때로 피가 너무 많아서 질병에 걸린다고 상상했다. 따라서 환자가 생기면 일단 피를 빼내어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가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희생자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다. 1799년 조지 워싱턴은 감기 증상으로 의사들에게 사혈을 받았는데, 8시간 동안 4번의 사혈 때문에 체내 혈액량의 40%에 달하는 2.4리터의 피가 뽑혀 나갔고 결국 다음날 사망했다. 음악가 모차르트도 과도한 사혈로 인해 사망이 앞당겨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피를 통해 젊음과 힘을 얻으려는 집착 역시 인류의 오랜 미신이었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은 상대방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힘과 용기를 얻으려 했다. 원주민 부족 전사들은 적의 피를 마셔 생명력을 흡수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또한 과거의 간질 환자들은 사형수의 피를 받아 마시려고 컵을 준비하기도 했다고 한다. 명나라의 황제라는 가정제는 젊은 여성의 월경혈로 약을 만들어 마시다가 참다 못한 후궁들에 의해 암살 시도를 받기도 했다.
혈액의 미래 전망
과학 기술의 발전은 피와 관련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혈액형에 관계없이 누구나 수혈받을 수 있는 인공 혈액 개발이라든가. 줄기세포를 이용한 혈액 생산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가성비가 매우 안 좋다고 한다. 책에서는 젊은 쥐의 피가 실제로 늙은 쥐의 근육과 뇌를 회춘시킨다는 연구 사례도 소개한다. 물론 마시게 했다는 건 아니다. 젊은 쥐의 피를 늙은 쥐에 투여하자 늙은 쥐의 새로운 뉴런이 평소의 3배나 늘어났고, 인지 기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65세 치매 환자에게 젊은 사람의 혈장을 투여한 실험도 있었는데, 치매 증상이 상당히 완화되었다는 결과도 소개한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미신이 현대 과학에 의해 일부 입증되었다고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하지만 아직 이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의 위험성 또한 경고하고 있다. 암 발생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연구팀들은 젊은 피의 어떤 성분이 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는지 정확히 밝히려 노력하고 있고, 노화 관련 질병의 새로운 치료법 개발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안전성도 효과도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은 연구와 임상 실험이 필요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