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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dler's Manual | 게으름 권위자의 매뉴얼

by 비비자 2025. 1. 22.
책 'An Idler's Manual'의 표지

 
 
 

생산성이라는 종교

독서는 느리고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취미다(적어도 숏폼 영상 넘기기, SNS 피드 확인하기에 비하면). 하지만 요즘은 독서의 경향도 조급해지고 있다. 더 많이 읽고, 더 빨리 읽고, 더 효율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시간 관리 책, 생산성 향상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한다. 분초 사회, 시성비라는 말도 등장했으니 말이다. AI 프롬프트를 짜듯 삶을 최적화하라는 조언이 넘쳐난다. 막연하게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고, 더 빨리 달려야 할 것만 같은 이 시대에 톰 호지킨슨은 정반대의 제안을 한다. 게으르게 살자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인의 생산성 강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늘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쉬는 시간조차 자기계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강박 말이다. 이런 비판은 얼핏 허황돼 보인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생산성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는 시대에, 이 책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단순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요즘 시대를 향한 조용한 혁명의 선언문처럼도 읽히는 책이다.

모두가 뛸 때 걸을 수 있는 사람

현대인에게 게으름은 낯설다 못해 두렵다. 시간 관리 앱이 알림을 울리고, 스마트워치가 활동량을 재고, 하루하루가 데드라인으로 가득하다. 이런 시대에 저자는 갖가지 게으름의 기술을 제안한다. 이 책은 '비활동 포인트'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벤치에 앉아있기, 일기쓰기, 도시 방황하기, 침대에서 더 오래 머물기, 소셜 미디어와 거리두기, 자급자족 실천하기 같은 것들이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행동들은 사실 요즘 사람들에겐 꽤나 도전적이다. 휴대폰을 보지 않고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슬슬 불안감이 올라올 테니 말이다.
물론 게으름에도 이유와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침대에서 더 오래 머무는 건 단순히 늦잠을 자라는 게 아니다. 어제의 성취와 실수를 곰곰이 되짚어보고, 하루를 여유 있게 시작하라는 의미다. 낮잠 또한 하루를 두 개의 관리 가능한 절반으로 나누어 생산성과 창의성을 높이는 도구가 된다. 이런 비활동들은 특별한 장비나 기술도 필요 없다. 하지만 용기는 필요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재촉하는 시대의 강박을 거부할 용기 말이다. 이 책은 그 용기를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작은 안내서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으름이라는 이단

현대인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산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저자는 과연 이런 삶의 방식만이 옳은 것인지 묻는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버티고 있는 걸까? 더 많이 일하고 더 빨리 달리는 게 정말 좋은 삶일까? 현대 사회의 강박에 저항하는 하나의 혁명적 제안을 던지는 것이다. 
저자는 게으름이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에피쿠로스가 말한 '고통의 부재'와 '정신적 평온'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부재'와 '정신적 평온'을 강조했다. 호지킨슨은 이런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 쉬는 시간조차 자기계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일상의 작은 게으름들이 우리를 자본주의의 속박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혁명은 느리게 온다

혁명이란 늘 불완전하고 느리게 진행된다. 모든 책이 그렇듯 이 책도 한계를 지닌다. 가장 큰 비판은 이 책이 특권적 시각에서 쓰인 것으로도 보인다는 점인 것 같다. 벤치에 앉아 있기, 낮잠 자기, 도시 방황하기 같은 제안들조차도 경제적, 사회적 안전망이 있는 사람들이나 즐길 법한 활동 아니냐는 거다. 생계를 위해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일말의 게으름도 사치스러운 이야기라고 성토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이 책의 본질적 가치를 무력화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비판은 책의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우리들을 속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니 말이다. 쉬는 것조차 특권이 되어버린 현실, 여유조차 기만이 되어 버린 세상. 생산성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얼마나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가. 이 책이 전하는 건 그러한 시류에 순응하지만 말고 저항해 보자는 관점 자체가 아닐까. 때로는 모든 이가 한 방향으로 달려갈 때 홀로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것이 가장 혁명적인 행동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혁명은, 마치 게으른 자의 발걸음처럼 천천히 우리 삶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